‘삶과 자연, 몸과 마음의 화해’

“현대인은 몸을 소유하려 듦으로써, 자신(소마)으로부터 몸을 객체화(바디)하는데 성공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외면적 풍요를 주었지만, 내면의 몸과 삶은 완전히 소비시켰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 사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마음과 몸 사이, 자연과 삶 사이에 전에 없었던 어마어마한 간극이 생겨났습니다. 소마앤바디에서 ‘소마’는 스스로 바라본 내면적 몸을 뜻합니다. ‘바디’는 외재적 관점으로 객체화된 몸입니다. 운동은 소마와 바디의 간극을 해소, 매개하는 수단입니다. 소마앤바디는 ‘정교한 테크닉, 명료한 티칭법, 참된 운동 철학’을 바탕으로 운동법을 가르치고, 통합된 운동 문화를 전파하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표는 ‘몸과 마음, 삶과 자연의 화해’를 슬로건으로 하는 세계 잼보리 캠프 주최입니다.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 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1863~1933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그리스 시인

‘정교한 테크닉, 명료한 티칭법, 참된 운동철학’

1. 正道, 방식을 중시합니다.

좋은 몸을 무작정 소유하려는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운동법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드뭅니다. 대부분 운동법을 시각적으로 따라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고, 좋은 몸을 소유하기 위해 그저 열심히만 합니다. 그 열심은 어쩌면 부상으로 향하거나, 금방 한계에 부딪히는 잘못된 방식일 수 있습니다. 소마앤바디는 좋은 몸을 ‘소유’하는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좋은 몸에는 관심이 있지만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몸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방식’의 전환에서 온다는 것을 믿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 칼 마르크스

2. 精到, 체화를 중시합니다.

‘체화 Imbodied’의 영역에 들어서면 운동법은 그 틀에서 벗어나 생명력 넘치는, 살아있는 움직임이 됩니다. 마치 피아노 한 곡을 완전히 체화하고 나면 눈 감고도 연주할 수 있는 것처럼 완전한 질적 수준을 이룩하게 됩니다. 이처럼 체화의 수준에 도달하면, 삶의 모든 움직임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운동을 통해 스쿼트 동작을 체화하면, 일상 속 앉고 서는 동작도 변합니다. 서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데드리프트, 스윙, 프레스 운동 역시 일상 속에서 이뤄지는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운동을 통한 변화는 신체 뿐 아니라 삶 전체로 확장됩니다. 진정한 체화는 삶 속에 자유롭게 녹아들어,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독서의 세가지 유형 중 첫째 유형의 독자는 마치 음식을 먹듯이 책을 대하는 순진한 독자로, 배불리 먹고 마시듯 그대로 받아들인다. 둘째 유형의 독자는 마부를 따르는 말이 아니라 마치 사냥꾼이 짐승의 자취를 더듬듯 작가를 추적한다. 셋째 유형의 독자는 너무나 개성적이고 자신에게 충실해서, 무엇을 읽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로 대한다. 누구나 오늘은 둘째 유형에, 내일은 셋째 유형에 속했다가 모레는 다시 첫째 유형에 속할 수도 있다.” – 헤르만 헤세

3. 正導, 의도를 중시합니다.
‘의도 Intention’를 통해 체화하세요. 현대 피트니스 문화 속 범람하는 ‘의미’들이 움직임의 본질적인 ‘의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스쿼트를 하고 있다면 앉고 서는 의도, 스윙을 하고 있다면 흔드는 의도를 명료하게 해야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교정, 정렬, 몸짱, 힘짱 등과 같은 효과를 내세우는 의미들과 긴장과 이완같은 이분법적 의미들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범람하는 의미들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의존케 합니다. 의도에 집중하고 주체적으로 탐구하세요. 추종자가 되지말고 자유인이 되세요. 의미는 당신을 즐겁게 하는 장난감입니다. 의도는 탐구하고 의미는 즐기세요.  

“언제 그대에게 확고한 계획이 있었는지, 얼마나 적은 날들만이 그대의 의도대로 지나갔는지, 언제 그대가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지, 언제 그대의 얼굴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언제 그대의 마음에 두려움이 없었는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그대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가 무엇을 잃는지도 모르는 사이, 그대의 인생을 빼앗아갔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근거 없는 괴로움과 어리석은 즐거움과 탐욕스러운 욕망과 매력적인 교제가 앗아갔으며 그대의 것 중에서 얼마나 적은 것이 남아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시오.” – 세네카

자각은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앎에 도달한 상태, 즉 자존과 현존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도달 시 사라진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로만 설명한다면, 자각은 형식에 기대어져 이 또한 개념에 의존하는 꼴이 된다. 결국, 간접적인 앎에 그친다. 자각을 ‘있는 그대로’ 실제 체험하기 위해서는 실재적 방법(호흡, 명상, 요가, 종교, 여행, 공부 등등)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수많은 방법이 ‘방법을 위한 방법’으로 집착. 즉, 과도하게 의미 부여될 때, 오히려 자각을 방해한다. 따라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방법으로 ‘운동’을 선택했지만, 사실 ‘운동’은 중요하지 않다. ‘운동’의 형태를 빌려온 ‘놀이’다. ‘놀이’의 형태를 빌려온 자존과 현존의 표현이다.

 

“해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헬스장, 체육관 등을 등록하고 ‘운동’을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운동을 그만둔다. 하지만 어떤 이는 한 해 두 해를 넘기고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록 운동을 한다. 오늘날 누구나 운동을 하지만, 얼마나 운동이 중요한지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소수만이 운동이 주는 특별한 경이를 체험한다. 바로 이들이 진정한 ‘운동가’가 된다.
 
이들은 운동의 세계가 얼마나 광활하고 다채로우며 즐거운지 깨우친다. 처음에는 이 세계가 자그마한 금붕어 연못과 튤립 화단이 달린 아담한 유치원 수준인 줄 알았는데, 그 유치원은 이내 공원이 되고 더 넓은 풍경이 되고 대륙이 되고 세계가 되고 낙원이 된다. 그리하여 늘 새로운 마법에 홀리고 늘 처음 보는 색색의 꽃이 만발한다. 또한, 어제까지는 정원이나 공원 혹은 울창한 숲으로 보였던 것이 오늘이나 내일쯤은 경건한 신전으로 다가온다.  수천의 홀과 뜰을 거느린 그 신전에는 모든 민족과 시대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새로이 일깨워지기를, 그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외적 형상들 속에 깃든 통일성을 발견해주기를 늘 고대한다.
 
이 무한한 운동의 세계는 모든 운동가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이며, 개개의 운동가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추구하며 경험한다. 태권도에서부터 아이키도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로스핏을 시작으로 레슬링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요가로 출발하여 타말파 요법으로, 현대 무용을 하다가 펠든크라이스의 가르침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수천의 길이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수천의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그 어떤 목적지도 최종은 아니요, 그 너머마다 광활한 세계가 또 새롭게 펼쳐진다. 진정한 운동가는 그런 울창한 운동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압도될지, 제대로 길을 찾아 자신의 운동 체험이 스스로 자신의 경험과 삶에 소용되게끔 할지는 각자의 지혜나 운에 달려있다.”
 
– 헤르만 헤세 (원문은 ‘독서’ 또는 ‘독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