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앤바디 백서

소마앤바디 백서

몸과 마음, 삶과 자연의 화해 sinc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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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

① 사업 목적

소마앤바디는 몸, 마음, 삶, 자연에 관한 사업을 다각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삶과 자연, 몸과 마음의 화해’를 슬로건으로 잼보리 캠프를 창설하고자 합니다. 10만명이 참여하는 30일 간의 글로벌 축제입니다. 대자연 속에서 삶, 자연, 몸, 마음에 관한 수백가지 프로그램을 향유하고, 자각과 현존의 기쁨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축제로 만들고자 합니다.

② 운동 목적

운동이 단순히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마앤바디는 고대운동, 케틀벨, 소마틱스 이렇게 세 가지 운동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고대운동을 통해 인류 원형적 움직임을 깨우고, 케틀벨 운동을 통해 자기 서사를 써내려가고, 소마틱스를 통해 자기 고유성을 계발하고자 합니다.

③ 교육 목적

악기도 연주법을 모르고 무작정 시작하면, 흥미를 잃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운동법을 모른 채, 무작정 운동을 시작하면 금새 한계에 부딪힙니다. ‘정교한 기술, 명료한 관점, 참된 운동철학’ 을 바탕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운동법을 익혀서, 몸과 마음 그리고 삶 전반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소마앤바디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④ 제작 목적

원형성, 영속성, 정통성, 매개성, 심미성을 가진 ‘문화적 가치가 있는 제품’을 만들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2012년부터 각 운동들의 기원을 현지 답사하고, 세계적인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연구 개발하고 있습니다. ‘정교한 기술, 명료한 관점, 참된 운동철학’ 교육 목적에 맞게, 제품도 같은 기준으로 제작합니다.

✊🏻 기준

① 가치관

현대인은 몸을 소유하려 듦으로써, 자기자신(소마)으로부터 몸을 객체화(바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외면적 풍요를 주었지만, 그만큼 내면의 나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몸과 마음 사이, 삶과 자연 사이 전에 없었던 어마어마한 간극이 생겨났습니다. 소마앤바디에서 ‘소마’는 스스로 바라본 내면적 몸을 뜻합니다. ‘바디’는 외면적으로 객체화된 몸입니다. 저희는 움직임을 통해 소마와 바디의 간극을 해소하고 ‘몸과 마음, 삶과 자연의 화해’를 이루고자 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 칼 마르크스

② 교육관

“언제 그대에게 확고한 계획이 있었는지, 얼마나 적은 날들만이 그대의 의도대로 지나갔는지, 언제 그대가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지, 언제 그대의 얼굴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언제 그대의 마음에 두려움이 없었는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그대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가 무엇을 잃는지도 모르는 사이, 그대의 인생을 빼앗아갔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근거 없는 괴로움과 어리석은 즐거움과 탐욕스러운 욕망과 매력적인 교제가 앗아갔으며 그대의 것 중에서 얼마나 적은 것이 남아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시오.” – 세네카

⑴ 정교한 기술 (정도精到)
정묘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운동법을 교육합니다. 운동법을 정교하게 체화하게 되면, 운동법은 그 틀에서 벗어나 삶의 모든 움직임에 영향을 줍니다. 체화된 움직임은 단순히 신체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로 확장되고 발현됩니다. 하나의 운동법을 체화하면, 일상 속 앉고, 서고, 걷는 동작도 변합니다. 운동법과 일상적인 움직임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체화된 운동법은 삶 속에 자유롭게 녹아들 수 있고,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⑵ 명료한 티칭법 (정도正導)
올바른 인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운동법을 교육합니다. 운동법은 ‘의도’를 통해 체화할 수 있지만, 현대 사회는 범람하는 의미들이 움직임의 의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슬림한 몸매, 근육질의 몸, 바르고 곧은 체형 등 효과를 내세우는 의미들은 이분법적으로 몸을 해석하고, 그 의미에 빠지게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범람하는 의미 속에서 그 안에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살피고 주체적으로 탐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제서야 의미는 즐겁게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됩니다.

⑶ 참된 운동철학 (정도正道)
정당한 도리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운동법을 교육합니다. 좋은 몸을 무작정 소유케하는 피트니스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리어 몸을 갉아먹으며 운동을 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좋은 운동법이라도 피트니스화가 이루어지면,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따라하게 하고 단순 반복케하는 인스턴트 요리 메뉴얼로 변질됩니다. 인스턴트 요리 매뉴얼에 삽입되는 우리를 유혹하는 맛있는 요리 사진처럼, 피트니스 운동법은 외적으로 좋은 몸을 자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바디’ 중심의 신체 운동법이 아닌 ‘소마’ 중심의 신체 운동법을 추구합니다. 몸, 마음, 움직임 그리고 삶까지 통합되는 운동법입니다.

③ 운동관

⑴ 원형
페르시안밀, 메이스벨, 인디언클럽, 클럽벨, 케틀벨, 스톤, 쉴드와 같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운동법은 오늘날 스포츠 및 피트니스 문화가 치장하고 있는 복잡한 장식을 하나하나 제거했을 때, 마지막에 남는 가장 원형적인 운동 형태입니다. 운동, 율동, 음악, 명상이 결합된 인류 원형적 운동 문화입니다. 농경, 수렵 그리고 전투와 같은 살냄새, 흙냄새가 뒤섞인 인류 보편적 행위에 기반합니다. 스포츠피트니스의 자연이자 힘의 원형입니다. 고대운동은 단순히 밀고 당기는 선형적 연결성을 갖는 움직임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적인 펜듈럼 움직임에 기반합니다. 중력점을 중심으로 강력한 진동 모멘텀을 갖습니다. 펜듈럼은 진동 그 자체인 우주가 만들어내는 비선형적 움직임이며, 작은 우주라 부르는 우리 몸도 펜듈럼 원리로 움직입니다.
“우리 몸도 하나의 펜듈럼. 패턴을 인지하고 진동을 자각할 것. 패턴은 음적이고 진동은 양적인 것. 우리 몸은 계속 변화한다. 우주처럼 스스로 그러함이다.” – 원형적 움직임에 대한 메모 2013.03.
⑵ 저항
현대 피트니스 문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동일 규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피트니스는 우리에게 특정한 체형, 체중, 체력을 강요합니다. 이미 우리 몸은 서로 평등한데도, 끊임없이 변하는 트렌드 속에서 평등 의식은 제거당하고 대신 동일 의식이 주입됩니다. 대부분 사람은 이 은근하고 매혹적인 강요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 동일해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집단적 동일 의식에 저항해야 합니다. 순응은 병사를 만들지만, 저항은 전사를 만듭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한다. 즉 모두 동일한 명령에 불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현대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는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한다.” – 에리히 프롬
⑶ 명상
명상은 형태가 아닌 상태입니다. 외부에 매몰되지 않고, 내면에 몰입한 자각 상태입니다. 이 자각을 경험하는 길은 다양하며, 몸을 움직임이면서도 가능합니다. 우리 몸은 중력장 위에 장력체로, 끊임없이 장력간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이 중력, 장력 관계에 많은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움직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자각 상태는 구조적 조직망과 기능적 신경망이 서로 통합된 체화 상태와 맞닿아 있고, 내면화된 몰입 상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 몸은 겉보기에 조용해도, 의식과 감각은 굉장히 활동적입니다. 이를 명상이라 합니다.
“명상의 조용함은 잠을 자서가 아니라 굉장히 활동적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가동하는 큰 발전기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다. 마찰이 있을 때만 소음을 내는 법이다.” – 크리슈나무르티
⑷ 호흡
모든 움직임은 호흡이 함께합니다. 의미없어 보이는 사소한 움직임조차 그 사람의 호흡을 대변합니다. 모든 움직임은 제마다 독특한 호흡과 리듬을 갖습니다. 이 속에서 운율성, 함축성, 회화성까지도 엿볼 수 있다. 움직임은 호흡으로 쓰여진 시고, 우리 모두는 움직임을 쓰는 시인입니다. 예를 들어, 일류 스포츠 선수들의 움직임은 한편의 장엄한 서사시처럼 보입니다. 주르카네와 아카라에서 행해지는 고대 운동가를 관찰하면 어떠한 운동보다도 강력한 모멘텀을 갖고 있어서 일종의 대항시처럼 보입니다.이처럼 움직임은 호흡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서, 호흡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서도 마음을 다스려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사물이 바로 보이고 사물이 바로 보이면 지혜가 드러난다.” – 위빠사나

④ 신체관

기존 신체관은 ‘키네틱 체인’이라는 관점으로 몸을 바라봅니다. 관절과 관절이 사슬처럼 연결됐다고 보는 기계적 관점입니다. 안정성이 더 필요한 관절과 가동성이 더 필요한 관절로 분류해서 기능적인 움직임을 구분합니다. 이에 따라 관절 기능은 관절과 관절의 연결에 있어서 안정성과 가동성이 확보될 때 양호하다고 평가합니다. 이를 측정하는 툴을 제공하고, 안정성과 가동성을 개선하는 움직임을 반복 숙달하도록 돕습니다. 오버헤드 스쿼트, 허들 스텝, 푸쉬업 등과 같은 움직임을, 제 3자가 보고 평가해서 대상의 가동성 및 안정성을 수치화합니다. 이에 따라 제공되는 가동성 및 안정성 운동들을 우리는 기능성 트레이닝이라 말합니다. 현재 대부분 사람들의 신체관은 이렇게 ‘바디‘, ‘키네틱 체인‘, ‘가동성과 안정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소마앤바디 신체관은 ‘바디‘가 아닌 ‘소마‘를 기준을 합니다. ‘소마‘ 관점에서 몸은 장력 간의 연속적 균형을 이루는, 중력장 위에 장력체. 즉 장력통합구조Tensegrity 로 정의됩니다. 이 연속적 균형을 갖기 위해서는 신체를 조직하는 막Fasia 이 네트워크망처럼 유기적인 연결성을 갖춰야 합니다. 이 연결성은 구조적인 동시에 기능적입니다. 이 연결성은 거미줄같이 촘촘히 짜여져있는 구조적 조직망인 동시에, 네트워크처럼 기능적 신경망입니다. 즉, 우리 몸은 구조와 기능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형태입니다.
이러한 유기적 형태를 잘 통제하기 위해서는, 구조와 기능을 통합하는 고유수용감각이 중요합니다. 고유수용감각은 오감처럼 외재 정보(보고, 듣고, 맡고, 닿고, 맛보는)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아닌, 내재 감각(위치감, 길이감, 무게감, 방향감 등등)을 처리하는 움직임 감각입니다. 움직임 감각은 외재감각 또는 제 3자에 의해 평가 또는 측정되기 어렵습니다. 1자적 관점 아래 고유수용감각을 동원하여 스스로 몸의 상태를 피드백해야 합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상태를 ‘소마‘라 합니다. 소마앤바디 신체관은 이렇게 ‘소마‘, ‘텐서그러티‘, ‘고유수용감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⑤ 창립관

자각은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앎에 도달한 상태, 즉 자존과 현존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도달 시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로만 설명한다면, 자각은 형식에 기대어져 이 또한 개념에 의존하는 꼴이 됩니다. 결국, 간접적인 앎에 그칩니다. 자각을 ‘있는 그대로’ 실제 체험하기 위해서는 실재적 방법(호흡, 명상, 요가, 종교, 여행, 공부 등등)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수많은 방법이 ‘방법을 위한 방법’으로 집착. 즉, 과도하게 의미 부여될 때, 오히려 자각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방법으로 ‘운동’을 선택했지만, ‘운동’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운동’의 형태를 빌려온 ‘놀이’입니다. ‘놀이’의 형태를 빌려온 자존과 현존의 표현입니다.
“해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헬스장, 체육관 등을 등록하고 ‘운동‘을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운동을 그만둔다. 하지만 어떤 이는 한 해 두 해를 넘기고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록 운동을 한다. 오늘날 누구나 운동을 하지만, 얼마나 운동이 중요한지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소수만이 운동이 주는 특별한 경이를 체험한다. 바로 이들이 진정한 ‘운동가‘가 된다. 이들은 운동의 세계가 얼마나 광활하고 다채로우며 즐거운지 깨우친다. 처음에는 이 세계가 자그마한 금붕어 연못과 튤립 화단이 달린 아담한 유치원 수준인 줄 알았는데, 그 유치원은 이내 공원이 되고 더 넓은 풍경이 되고 대륙이 되고 세계가 되고 낙원이 된다. 그리하여 늘 새로운 마법에 홀리고 늘 처음 보는 색색의 꽃이 만발한다. 또한, 어제까지는 정원이나 공원 혹은 울창한 숲으로 보였던 것이 오늘이나 내일쯤은 경건한 신전으로 다가온다. 수천의 홀과 뜰을 거느린 그 신전에는 모든 민족과 시대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새로이 일깨워지기를, 그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외적 형상들 속에 깃든 통일성을 발견해주기를 늘 고대한다. 이 무한한 운동의 세계는 모든 운동가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이며, 개개의 운동가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추구하며 경험한다. 태권도에서부터 아이키도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로스핏을 시작으로 레슬링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요가로 출발하여 타말파 요법으로, 현대 무용을 하다가 펠든크라이스의 가르침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수천의 길이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수천의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그 어떤 목적지도 최종은 아니요, 그 너머마다 광활한 세계가 또 새롭게 펼쳐진다. 진정한 운동가는 그런 울창한 운동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압도될지, 제대로 길을 찾아 자신의 운동 체험이 스스로 자신의 경험과 삶에 소용되게끔 할지는 각자의 지혜나 운에 달려있다.” – 헤르만 헤세 에세이 모음집 ‘독서의기술’ 인용